∆W



Korean English

근원- 소리- 기억, 김은희.   Primal Sound and Memory, Eunhee Kim.
델타 더블유, 예뻬 우겔비그.  delta w, Jeppe Ugelvig.
    
근원- 소리- 기억 

그 속에서, 몇 센티미터 안 되는 그 회색 사각형들 속에서 프루스트는 경계 없는 공간과 현실적이지 않은 미세한 것들의 무리, 향기, 생각, 성찰, 고민, 색상, 물체, 이름, 시선, 감정 등을 발견한다. 그 모든 것이 마르셀의 귀 사이, 뇌 주름 속에 들어 있었다.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시간의 흐름이다. 저 안에, 우리 내면의 신경에 남아 있는 그토록 중요한 과거의 흔적들이 있는 곳에 시간의 흐름이 자리 잡고 있다.  -카를로 로벨리 1)


1969년 5월 18일에 발사된 아폴로10호가 달의 뒷면을 지나가던 중, 세 명의 우주비행사, 토머스 스태포, 존 영 그리고 유진 서넌은 휘파람 비슷한 이상한 소리를 듣게 된다. 그들은 이 소리를 외계에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처럼 감지하면서 지구에 도착해 이 사실을 말하게 된다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농담처럼 말했다. 같은 해 7월 16일에 발사된 아폴로11호에 승선한 마이클 콜린스 역시 정체불명의 괴상한 소리를 듣고 공포에 사로잡혔다. 2003년, 선저우 5호에 탑승한 중국 최초의 우주비행사 양뤼웨이는 무엇인가가 선체를 두드리는 것 같은 지속적인 소리를 들었다.
    기이한 소리를 처음 접한 우주비행사들의 뇌리에 소리의 출처에 대한 질문이 스쳐지나갔다. 물론 출처를 추론할 정확한 정보는 존재하지 않는다. 유사한 결과물의 샘플들에 근거해 가정해볼 뿐이다. 외계의 자연음, 어떤 행성으로부터 온 신호, 주파수의 혼선, 폐쇄된 공간에서 발생하는 비행사들의 집단 환청 등, 여러 가지로 추측해볼 수 있다.
    정체를 모르는 소리는 듣는 이에게 공포를 안겨준다. 이 소리를 직접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어쩌면 우주선 내부의 기계음인데 비행사들이 착각한 것은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달의 궤도를 돌던 아폴로10호의 비행사들은 한 시간 가량 지속된 이 소리를 녹음했고 녹음파일은 미국 휴스턴의 우주관제센터에 전송되었다. NASA의 미확인파일(NASA’s unexplained files)로 분류되었던 이 파일은 2008년에 기밀이 해제되어 40여 년 만에 대중에게 공개되었다. 마이클 콜린스는 후에 자신의 책에서 무선 통신 기술자들이 이 소리를 달착륙선과 사령선의 초단파 라디오 주파수 간의 혼선으로 추측했다고 서술한다. 행성 과학자 케빈 그라지에Kevin Grazier는 토성에서도 비슷한 소리가 포착된 적이 있으며 아마도 토성을 통과하는 하전입자에 의해 발생한 소리일 수도 있다고 다큐멘터리 TV시리즈 ‘나사의 미확인 파일’에서 말한다.
    인간의 신경경로는 소리의 방향을 정확히 인지할 만큼 정밀한 편이어서 소리의 크기, 시간의 차이, 주파수의 차이를 어느 정도 감지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소리의 좌우 위치와 이동방향, 주파수의 고저까지 식별한다고 해서 파동의 출처 혹은 근원을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게다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주파수의 범위는 20헤르츠에서 20킬로헤르츠 사이라서 이 범위를 벗어나는 주파수는 파악이 불가능하다. 아폴로10호와 11호의 외부에서 내부로 전파되는 휘파람 같은 소리도, 선저우5호의 선체를 두드리는 것 같은 소리도, 우주비행사들의 신경경로를 통해 인식 가능한 범주의 소리이다. 이 소리는 압축과 희박이 교대로 나타나는, 즉 고압과 저압 영역이 특정 속도로 움직이는 음파의 물리적 성질을 가진다. 그렇다면 우주선 밖 진공상태의 우주에서는 당연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아야 한다. 우주를 떠도는 어떤 조각들이 아폴로10호에 부딪치더라도 파동을 전파시킬 공기가 없다. 매질이 없는 진공상태에서 파동이 전파된다면 아마도 빛과 전자기파일 것이다. 아폴로10호와 11호의 비행사들이 들은 소리와 관련해선 무선통신기술자들의 말대로 우주선 간의 교신 주파수 간섭이 가장 그럴듯한 추론이다.  
만약 지구자기장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강력한 자기장을 가진 토성을 통과중인 하전입자가 움직일 때 발생하는 소리와 유사하다면, 지구와의 교신이 끊긴 시점에 달의 뒷면을 통과하는 우주선 주변의 환경에 대한 조사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유튜브를 통해 아폴로10호의 비행사들이 녹음한 문제의 그 소리를 들었다. 흥미로운 점은 비행사들과 마찬가지로 내게도 이 소리가 높낮이가 있는 기묘한 음악처럼 들린다는 사실이다. 소리의 출처는 어쩌면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겠지만 학습된 우리의 뇌는 이 낯선 소리를 음악처럼 들을 수 있다. 아주 희미한 멜로디의 흔적 같은 소리. 경위가 어떠하든, 우주에서 듣게 되는 정체불명의 이 소리는 소리란 근본적으로 물리적 사건임을 내게 환기시킨다. 지구 밖이 아니라 지구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로 대상을 전환해도 에너지가 담겨 있는 물리적 사건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또한 음악적 체계와 상관없이 이 미스터리한 소음이 음악적 진동으로 기억될 수 있다는 사례가 된다.


소리는 “이전의 음이 ‘보존’되고, 그 다음에는 보존된 음이 보존되고, 그런 식으로 계속 진행되다 현재는 점점 더 희미해지는 과거의 연속적인 흔적들을 포함하고”2) 있다. 이론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는 “이러한 보존과정을 통해 현상이 ‘시간을 구성’한다”는 에드문트 후설의 말을 인용한다.3) 후설은 ‘시간의식의 분석’4)에서 음을 음악으로서 파악하는 지각 작용을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을 설명하는 데 이용한다. 후설에 의하면, “잇따라 일어나는 여러 음이 하나의 선율을 이룰 수 있음은, 오로지 심리적 사건들의 서로 잇따름이 ”단번에“ 하나의 전체 구조로 통합됨에 의해서이다.”5) 음과 지속을 지각하는 과정을 후설은 이렇게 설명한다. “모든 음은 각각 그 자체로 시간 연장을 가진다. 처음 소리가 날 때에는 나는 그 음을 ‘지금’으로 듣는다. 하지만 그 음은 계속 울리면서 계속 새로운 지금을 가지며 그때마다 이전의 지금은 과거로 변화한다.”6) 후설에게선 과거지향은 ‘지금’의 생기를 구성하며, 과거지향 속에서 ‘방금 지나가버린 것’에 대한 의식을 갖게 된다. 음은 지속되는 동안 불변하며 지속 안에서 불변하는 이 음은 어떤 변전을 겪게 된다.7) 
    질료로서의 소리는 ‘의식 경과의 내재적 시간’과 관계한다. 하지만 소리를 구성하는 정보는 외부 세계에서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과 관계하기 때문에 소리는 ‘거시세계의 평형’ 상태 속에 흐릿하게 인식된다.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은 “엔트로피가 존재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희미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8) 그의 연구에 따르면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이 희미함과 깊이 연결돼’9)있다. 카를로 로벨리는 “사물의 미시적인 상태를 관찰하면 과거와 미래 사이에 차이를 만들어내는 희미함이 사라질 수 있으며, 원인과 결과의 구분도 없어질 것”10)이라고 가정했다. 
    모든 광자를 파동으로 파악하는 양자역학의 세계를 만나게 하는 예술적 매체가 있다면, 상상계와 실재계의 차이 또한 사라지는 일이 될 것이다. 관찰 대상으로서의 소리를 인간이 청각적 쾌감을 위해 체계화한 음악적 구조에 끌어들이는 일은 분명 예술적 행위이다. 대상화된 소리는 과거의 ‘현재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이 지나간 현재성을 구성하는 정보는 특정 장소의 특정한 매질과 반응하는 물리적 현상과 작용한다.
    객관적 시간의 구성이 가능한가? 지구의 자전과 공전 방향 및 속도에 따른 우주적 시간과 별개로 우주의 현재는 존재하지 않는다. 광자가 빛의 속도로 지나가는 최소 단위 시간인 플랑크 시간은 너무나 짧아서 측정하기 힘들며, 시간의 간격은 균일하지 않고 불연속적이다. “시공간이 파동처럼 흔들리며 다양한 형태로 ‘중첩’될 수 있다면, 한 입자가 공간에서 널리 퍼질 수 있듯이 과거와 미래의 차이도 흔들릴 수 있다.”11)



주관적 영역의 소리는 우리가 청각을 통해 음파를 지각할 수 있을 때에만 존재한다. 그러나 ‘나’의 청각범위를 벗어나는 소리들은 도심 공터를 날아다니는 곤충들과 이웃집 개들이 듣고 있다. 음악이라는 하나의 통합된 체계와 상관없이 기억을 통해 지각되는 음파의 다양한 성질을 지각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소리를 보이지 않는 움직임, 즉 주파수의 전파가 인간의 신경경로와 만나는 물리적 현상으로서 탐구하면 음악에서 배제된 소음의 세계가 열린다. 프리드리히 키틀러는 축음기의 발명과 함께 19세기가 되어서야 발전하기 시작한 주파수 개념의 등장을 기존의 음악적 개념들과 결별하는 사건으로 다룬다. 비음악 분야에서 등장한 주파수에 입각한 수량화가 시각적, 언어적 표현 이론에 의해 배제된 존재론적 영역을 열었다. 키틀러는 “실재계가 상징계를 밀어내고 출현한다”고 표현했다.12) 크리스토프 콕스Christoph Cox13)는 니체가 말한 것처럼 음파 유물론을 통해  “인류를 다시 자연으로 변환하는” 반인간주의 프로젝트의 완성을 언급한다. 그는 “사운드 아트가 주체와 객체, 정신과 물질, 문화와 자연 사이의 존재론적, 인식론적 대립을 거부하는 철학적 자연주의와 유물론을 통해” 이해될 수 있음을 강조한다.14)


혼성 아티스트 듀오 ‘그레이코드와 지인’의 전시 작품 및 라이브 퍼포먼스를 내가 접하게 된 건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 중 현장에서 보지 못한 작품들도 많다. ≪poetic canon≫(2022), ≪25/signal minus noise≫(2023) ≪+3x10^8m/s, beyond the light velocity≫(2017-2018), ≪delta w, composition film≫(2023), ≪Δw (delta w)≫(2023). 이것이 내가 직접 목격한 그레이코드와 지인의 작업들이다. <+3x10^8m/s>이 빛의 속도를 나타내고, 그리스 대문자 Δ(델타)가 어떤 양의 변화를 나타내고, W가 시스템이 수행한 작업이라면, 입자와 파동의 성질을 동시에 지닌 양자역학의 세계, 혹은 열역학 제2법칙에 따라 엔트로피가 증가 중인 어떤 자연현상과 시간의 방향성을 우리는 떠올릴 수 있다. <델타 더블유, 컴포지션 필름>은 제주도 노지의 바다에서 포집한 입력 신호를 주파수로 바꾸고 다시 출력을 통해 본래의 장소로 되돌려주는 퍼포먼스를 기록한 16분 40초(1/1000Hz 주기)의 영상이다. 그레이코드와 지인이 <Wave Forecast>라 명명한 이 퍼포먼스는 물리적 변화량이 동반하는 시간 현상을 보존한 일종의 아카이브 구축이다. 포집된 정보(진동수, 주기, 변화량)들은 지나간 시간의 재현을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보존된 시간에 내포된 특수한 성질들을 추출하고 16분 40초의 고립된 시간 차원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레이코드와 지인이 모델링하고자 한 자연의 항상성과 순환은 송은 갤러리 지하 공간에서 전시 ≪델타 더블유≫ 형태로 나타났다. 8개의 작은 지향성 스피커를 통해 시차를 두고 이동하는 과거의 소리들은 메시지를 전달하거나 표현하지 않는다. 단지 소리에 담긴 원시적 힘, 에너지의 이동을 감각하도록 공간 안에 지표를 설치한다. 추출하고 정리하고, 중첩시키거나 조정하는 작업과정을 통해 질료로서의 사운드는 무한대의 시간을 임의의 시간대로 고립시킨다.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리사 랜들은 “여분 차원이 있다면, 여분 차원의 지문이 분명 존재할 것”15)이라고 말한다. 여분 차원은 “칼루차-클라인 입자(KK 입자)16)라는 흔적을 남기며, 이 입자는 여분 차원 우주를 이루는 또 다른 추가 요소로서 고차원 세계가 4차원에 남긴 지문과 같다.” 17)
 랜들은 이것을 “여러 공진 모드를 중첩시켜서 바이올린 현의 어떤 소리라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18)에 비유한다. 물리학 이론을 수학적으로 이해할 능력이 없는 나로선 여러 개의 공진 모드를 중첩시켜 소리를 만드는 경로를 상상해보니 KK 입자가 유령입자19)처럼 생각된다. 4차원 세계에서 숨은 그림(지문) 찾기를 통해 고차원 세계에 여분으로 말려 있는 여분 차원을 찾아낼 수 있을까? 누군가가 4개의 현이 활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발생하는 진동을 수학적으로 추적할 방법을 연구한다면, 그 일은 과거에 기록된 정보를 확인하는 작업이 될 것이다. 진동이 일어나면서 동시에 여러 파동의 방향성과 지속성이 우리의 내적 의식 안에 특정한 시간의 흐름을 지각하게 한다. 후설은 “공간이 다중적으로 채워지고, 시각적 채움과 촉각적 채움이 서로 평행하여 합치하는데, 시간의 경우, 서로 분리되어 합치하지 않지만 하나의 동일한 시간 구간 속에 있으면서 지속하는 사물을 가지고 있다”20)고 말한다. 시간의 흐름을 인지하는 내적 의식의 움직임은 곧 인간 의식의 한계이자 고통이다. 만약 다중으로 채워지는 공간처럼 과거-현재-미래가 동시적으로 일어난다면, 모든 인과관계는 애당초 성립되지 않는다.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주인공 루이즈가 외계인의 언어인 헵타포드를 배워가면서 새로운 기억에 눈이 뜨이는 것처럼 혁명적인 사건이 될 것이다. 


“보통 <헵타포드 B>는 단지 내 기억에만 영향을 끼친다. 나의 의식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시간선을 따라 기어가듯이 전진하는 얇디얇은 담뱃불이며, 달라진 것이 있다면 기억의 재가 뒤뿐만 아니라 앞에도 존재한다는 점이다. 이따금 <헵타포드 B>가 진정한 우위를 정하면서 그 단편(斷片)을 흘끗 목격할 수 있을 때는, 나는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경험한다”21)




서사를 통한 감정이입 유도를 위해 친숙한 선율적인 굴곡을 디자인하는 작업들과 달리, 소리 자체의 물리적 힘에 집중하는 사운드 아트는 현실의 표상을 만들지 않는다.  칼루차-클라인 입자처럼, 근원으로부터 오는 과거 또는 미래의 흔적을 찾아가는 여정에 가깝다. 소리의 근원, 태초의 진동이 발생하던 시점, 혹은 우리가 보지 못하지만 이미 일어난 미래의 시점으로 회귀하는 경로이다. 특정한 시점, 위치, 장소의 희미한 평형상태, 대칭성을 깨트리는 미시세계의 틈을 탐험하는 작업이다.
    그레이코드와 지인의 전시 ≪델타 더블유≫나 ≪빛의 속도를 넘어≫는 몰입을 유도하기 위한 수사학적 장치를 사용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의 작업은 자연스럽게 장식이 없는 미니멀한 구성이 된다. 사운드의 의미화를 차단하기 위해 개별 음파들의 물리적 정보로 구성된 일종의 ‘어의문자(semagram)22)’와 같은 일시적 체계를 상상해보자. 수학 방정식이나 음악의 표기법과 유사한 다른 차원의 문자체계가 있다면 과거와 미래의 기억을 동시에 가진 현재를 2차원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시제의 구분이 없이 동시적으로 사고하는 외계 생물종의 어의문자와 같은 새로운 언어 또는 소통방식은 어디까지나 삭제된 미래의 기억을 현재의 인류가 회복했을 때 가능하다. 



1877년 에디슨이 발명한 최초의 축음기 포노그래프가 대중의 관심을 받게 되었을 때,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그의 에세이 「근원-소음UR-GERÄUSCH」(1919)23)에서 어린 시절 학교에서 포노그래프를 만드는 실험을 했다고 이야기한다24). 실험은 마분지와 유리병 덮개로 쓰이는 종이로 진동판을 만들고, 옷솔의 털 가닥을 꽂아 소리를 기록하는 식이었다고 한다. 십여 년이 지난 후 해부학 강의에서 본 두개골을 구해 며칠 밤을 들여다보던 릴케는 두개골의 관상봉합선에서 “옷솔의 털끝이 작은 왁스 실린더 위에 새기던” 기호들을 떠올린다. 릴케는 “자신의 기억을 압도했던 것은 깔때기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아니라 그 실린더에 새겨진 기호들”25)이었다고 적고 있다. 
    소리의 진동을 받은 바늘이 회전하는 원통형의 왁스실린더 위를 지나가면서 표면에 자국을 남기면, 포노그래프에 소리가 저장된다. 이렇게 찍힌 자국을 다시 회전시키면 기록된 소리가 재생된다. 릴케가 말한 기호는 진동이 회전하는 왁스실린더 위에 새긴 흔적이다. 소리는 진동이 남긴 과거의 흔적을 회전시킬 때 부활한다. 두개골의 관상봉합선을 닮은 왁스 실린더 위 물리적 흔적은 과거의 소리가 자연적으로 형성한 첫 이미지이다. 릴케는 두개골의 봉합선 위에 포노그래프의 바늘을 올려놓는 상상을 했다. 키플러는 관상봉합선이 재생하는 소음을 ‘작가의 고유한 매체인 문자와 맞서는 대립물인 백색소음26)’이라고 말한다. 릴케의 ‘근원-소음’이 촉발한, 문자로 저장할 수 없는 이 소음은 기술적 방법을 동원한 실험을 통해 발전돼간다. 키플러는 모홀리-나기László Moholy-Nagy의 음반 ‘새김문자’가 ‘두개골에서 소리를 끌어내보자는’ 릴케의 제안과 일치한다고 보았다.27) 문자로 저장되지 않는 원시적 신호로부터 변환된 소음은 이미지와 사운드의 관계를 또 다른 차원으로 이끈다.
      그레이코드와 지인은 악보나 주파수 데이터와 같은 시각화된 흔적을 사운드 구축물이 재생되는 공간 안에 놓는다. 공간 속에서 현재화되는 물리적 흔적들의 추상성은 ‘추상영화’의 그래픽 이미지와 다르다. ≪포에틱 캐논≫이나 ≪빛의 속도를 넘어≫의 설치 영상은 이미지의 운동성이 사운드의 메타포가 되지만, ≪델타 더블유≫의 데이터 드로잉은 자연 발생하는 에너지가 물리적 신호로 변환되는 과정의 캡처이다.
      음악과 결합해 추상적 이미지가 연속되는 그래픽 영상들을 제작하는 작가들의 작품 중 상당수는 1920년대 추상영화를 이끌었던 한스 리히터Hans Richter나 비킹 에겔링Viking Eggeling의 영화를 상기시킨다. 추상영화가 연속되는 추상적 이미지의 움직임을 통해 우리의 지각에 일으키는 내적 현상들, 즉 순간적으로 포섭한 것들을 기억 속에 저장하는 방식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추상회화를 바라볼 때, 단번에 전체 그림의 구도와 요소들이 시신경을 통해 기억 속에 쉽게 각인되는 데 반해, 기하학적 도형이나 움직이는 선과 같은 형태, 빛의 산란과 색의 번짐과 같은 추상적 형태가 연속되는 영상은 총체적 인상 너머로 형태들의 기억이 사라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서사를 생산하는 인물이나 풍경이미지가 연속되는 영화를 추상영화와 비교하면 기억의 선명도나 ‘포섭관계’28)의 차이는 더욱 명확해진다. 서사를 통해 학습된 기억의 작용 때문일 것이다. 반면 추상적 이미지는 그 형태보다는 색채, 명암, 리듬을 포함한 운동성 등이 통합된 전체의 흐름으로 파악되기 쉽다. 이 총체적 인상 덕분에 이미지의 자세한 형태를 단번에 기억해낼 수는 없지만 추상이미지는 잠재적 형태로 무의식 깊은 곳에 저장될지도 모른다.
    연속되는 추상적 이미지가 만들어내는 총체적 인상엔 대체로 이미지의 회화적 요소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 추상적 이미지가 어떤 대상의 재현이 아니라 과거의 어떤 신호를 기록한 흔적이라면, 이러한 이미지는 우리에게 익숙한 회화적 구조를 초월한다. 한스 리히터의 <리듬 21>(1921)의 추상적 이미지가 상징계라면 두개골의 봉합선 이미지는 추상적 형태이면서 실재계이다. 그레이코드와 지인이 포집한 주파수의 기록들 역시 추상적 형태이면서 실재계에 속한다. 따라서 고차원 세계에 숨겨진 여분차원의 흔적과 같은 이 기록들을 탐색하고 해석하려면 새로운 감각의 차원을 받아들이는 학습과정이 필요하다.  
     그레이코드와 지인의 ≪Δw≫ 주파수가 지하공간 안에서 송출될 때, 오디오 시그널은 데이터 드로잉으로 변환된다. 그래픽 이미지나 다이어그램은 ‘시간-이미지’를 형성하는 지속, 분리, 연속의 과정을 이루는 음파의 정보(혹은 규칙)들을 모사한다. 
    ≪델타 더블유≫를 비롯한 그레이코드와 지인의 사운드 아트는 귀를 현혹하지 않는다. 이들의 사운드 아트는 관람자의 주의를 요한다. 우리는 조용히 귀를 기울여 소리를 식별해야 한다. 자연의 소리를 인위적으로 가공하지 않고 본래의 에너지가 발생하던 시점으로 관람객을 초대하는 일, 그것이 그레이코드와 지인의 작업이다. 변화의 구분점을 식별하긴 어렵지만 귀를 기울이면 우리는 물결의 출렁거림과 파도의 격정까지 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레이코드와 지인의 작업처럼, 소리를 통해 물리적 사건이 발생한 시점으로 회귀하는 시도는 내가 막연히 상상하고 있는 예술의 낯선 지형을 다시 기억하게 한다. 
    그곳엔 간격을 두고 소리의 지표가 세워져 있다. 이 지표를 따라 걸으면 주파수의 방향을 감지할 수 있다. 정체모를 소음이 균열을 만들면 희미한 거시세계의 균형이 깨진다. 그곳에서 우리는 삭제된 미래의 기억을 회복할 수 있다.


소리의 아름다움은 자연에 있습니다. 그 효과는 순전히 물리적입니다. 그것은 반향체와 그것의 모든 정제수(나뉘어 떨어지는 부분)에 의해 아마도 무한대로 움직이는 다양한 공기 입자의 협력으로 인해 발생합니다.29) -장 자크 루소

글. 김은희


1)  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중원 옮김, 쌤앤파커스, 2019, p.194.
2) 같은 책, p.191.
3) 같은 책. p.191.
4) 에드문트 후설, 『에드문트 후설의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 이남인/김태희 옮김, 서광사, 2020, pp.103-179. 
5) 같은 책, p.105.
6) 같은 책, p.108.
7) 같은 책, p.239.
8) 카를로 로벨리,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이중원 옮김, 쌤앤파커스, 2019, p.41.
9) 같은 책, p.42.
10) 같은 책, p.42.
11) 같은 책, p.95.
12) 프리드리히 키틀러, 『축음기, 영화, 타자기』, 유현주, 김남시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9, p.54.
13) 철학자, 문화비평가, 비주얼 앤 소닉아트 큐레이터로서 『Sonic Flux: Sound, Art and Metaphysic』 등의 저서가 있다.
14) Christoph Cox, Sonic Flux: Sound, Art and Metaphysics, The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18, p.3.
15) 리사 랜들, 『숨겨진 우주』, 이민재 옮김, 사이언스 북스, 2008, p.522
16) 일의 수학자이자 수리물리학자인 테오도어 칼루차는 4차원 시공간에 보이지 않는 숨겨진 차원이 있을 가능성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아인슈타인의 일반상대성이론을 5차원 공간에 적용해 5차원에서 4차원의 중력과 전자기력을 통합하는 가설을 1921년에 발표했다. 1926년, 스웨덴의 이론물리학자 오스카르 클레인은 칼루차의 고전물리학적 이론을 양자 해석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닫힌 5차원에서 공명하는 5차원 파동방정식을 발견했다.
17) 같은 책, p.522.
18) 같은 책, p.523.
19)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유령과 같은 입자라 생각해 말 그대로 유령입자라 명명했는데, 유령입자의 영문 표기 ghost particle은 중성미자를 가리킨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다.
20) 에드문트 후설, 『에드문트 후설의 내적 시간의식의 현상학』, 이남인/김태희 옮김, 서광사, 2020, p.266.
21) 테드 창, 「네 인생의 이야기」, 『당신 인생의 이야기』, 김상훈 옮김, 행복한 책읽기, 2004, pp.208-209.
22) 테드 창의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루이즈는 외계인의 문자를 어의문자로 명명한다. 어의문자는 순차적 시제를 가진 인류의 언어와 다른 차원의 언어구조를 가진다.
23) 2015년, 카스텐 니콜라이Carsten Nicolai는 릴케의 『UR-GERÄUSCH』를 다시 책으로 발행하고 동시에 동명의 제목으로 전시를 개최하였다.
24) 프리드리히 키틀러, 『축음기, 영화, 타자기』, 유현주, 김남시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19, pp.78-79.
25) 같은 책, p.80.
26) 같은 책, p.88.
27) 같은 책, p.91 1923년, 모홀리-나기는 음향이 존재하지 않던 음반에 일련의 문자를 새겨 넣어 음향 현상 자체가 생겨나게 하는 방법을 통해 “재생산 도구로서의 그라모폰을 생산도구로 만들 것”을 제안했다.
28) 앙리 베르그손, 『물질과 기억』, 박종원 옮김, 아카넷,2005, p.256.
  베르그송은 과거의 자체적인 존속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우리 사고의 곤란함은 “우리가 공간 속에서 순간적으로 포착된 물체들의 전체에만 적용되는 포섭관계[포함하는 것과 포함된 것의 관계]의 필요성을 시간 속에서 기억들의 계열에 부여한다는 사실로부터 비롯한다고” 말한다.
29)Jean-Jacques Rousseau, Essai sur l’origine des langues, GF-Flammarion, 1993, p.108.